[글작가] 정진 작가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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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진
 
 
* 작가약력
 
1964년 서울 출생
새벗 문학상(94년)과 샘터, 여성신문 문학상(93)을 단편 동화들로 받음.
단국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에서 아동문학으로 박사과정 수료. 한국독서지도연구회 초빙 연구원, 서경대학교, 신흥대학, 장안대에서 아동문학 강의를 하고 있음.
쓴 책으로는 <돌 맞은 하마 궁둥이>, <코딱지 먹는 이무기>, <우리 반 암행어사>, <어린이를 위한 경청>, <새라의 신비한 비밀옷장>, <천적과 여행하기>, <모래에 써서 괜찮아>, <내 이름은 김창>, <황금갑옷을 빌려줄게>, <칭찬 한 봉지> 등이 있음.
 
 
*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1)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핏줄로 이어받은 것
산부인과 의사면서 평생 무명작가로 살다 가셨던 외할아버지, 영화감독이 꿈이었던 아버지와 문학소녀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음. 어찌 보면  작가의 꿈을 ‘유전자’로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책이 나오면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신다.
 
(2) 유년 시절 행복한 기억
아버지가 세계문학 전집,
이원수와 강소천 전집,
조흔파와 오영민의 아동소설들을 마음껏 사다 주신 일
그 시절 <소년세계>나 <만화왕국>, <소년중앙> 같은 잡지도 다 사다주셨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환경에서 책들을 마음껏 읽으며 자연스럽게 작가의 꿈이 생겼다. 또 방학 때마다 외갓집에 놀러 갔는데, 김제에 있던 외갓집은 기차처럼 길게 생긴 집이었다. 산부인과 의사였던 외할아버지는 틈틈이 소설을 쓰셨고 서재에 원고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백일장에서 상을 받으면 너무 기뻐하시며 책방에 데려가서 책을 사주셨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3) 여고 시절 받은 상처
중학교 때부터 ‘글 쓰는 아이’로 불리던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랑 3학년 때 선생님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문예반 선생님과 국어 선생님이 나의 글을 보고 따끔한 충고를 해주셨다. “넌 박경리 같은 대작은 쓰기 힘들다!”라고 했고,
“학교마다 잘 쓰는 아이들을 한 명씩 뽑아서 다 모으면 너는 중간 정도의 수준일 거다”라는 말도 들었다.
두 분은 내 재능의 한계를 예리하게 꿰뚫어보셨다. 그 말씀은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작가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스스로 진지하게 던지도록 해주었다. 재능이 모자라도, 대작을 쓰지 못해도,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되지 못해도 넌 여전히 글을 쓰겠는가, 라는 질문은 그 후로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4) 시와 동화의 매력을 깨닫게 해주신 스승들
대학에 가서는 오규원 선생님을 만나 ‘시’를 배웠고 ‘특별한 상상력이 있다’는 칭찬도 들었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예술의 빛’ 창의상을 학교에서 받기도 했다.
 
(5) 소설가가 꿈이었는데, 시만 배우고 졸업을 한 셈이다. 여전히 글은 잘 안 써지고 한심한 청춘이었다. 그 무렵엔 학교에 ‘아동문학’ 과목이 없었다. 국문과에 편입을 해서 다니고, 졸업을 해서 출판사에 다니면서 남의 글을 책으로 만드는 일을 배웠다. ‘작가’가 되기는 영 글렀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다.
 
(6) 우연히 읽은 정채봉 선생님의 책들
그분의 문학과 신앙의 어울림이 참 바람직하고 훌륭하게 느껴졌다. 정채봉 선생님한테 동화를 배우는 제자들 중의 한 명이 되었지만, 아동문학의 매력만 알게 되고 내 글을 열심히 쓰지는 못했다.
직장 생활과 결혼, 출산과 육아 때문에 치열하게 매달리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몇 군데서 동화가 당선이 되어 등단은 하게 되었지만, 스승인 정채봉 선생님이 늘 어려웠다. 선생님이 그토록 일찍 하늘나라에 가시다니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더 자랑스럽고 훌륭한 제자가 되어 드리지 못했던 점이 부끄럽다.
 
(7) 행복한 이무기가 되자!
93년, 94년에 단편동화로 간신히 등단을 했지만 아주 오래도록 창작집을 내지 못했다. 전집이나 엔솔리지는 여러 권 냈지만 나만의 창작집은 한 권도 없었다. 그 설움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은 ‘한’처럼 내 속에 남아 있었다. 마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암담했다. 문화센터, 청소년회관, 초등학교 등에서 아이들에게 논술과 글짓기를 지도하면서 어느새 나는 ‘작가’보다는 ‘글짓기 강사’로 정착이 되어 가고 있었다.
 
(8) 2002년 새벗 선배님이신 박상재 선생님의 권유로 대학원에 가다.
문예창작 대학원에 가서 아동문학 공부를 하면서 작가로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작가의 정체성’을 새로 인식하게 되었다.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점은 ‘이무기라도 장하다’는 점이었다. 아무 꿈도 꾸지 않은 뱀보다는 이무기가 특별한 능력이 많고 대단하니까, 용이 되지 않아도 너무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이무기’에 대한 내 마음은 스스로를 용서하고 감싸주려는 자기애였던 것 같다.

(9) 내가 쓴 책들
대학원에 가서 얻은 것들 중에서 ‘동화’와 ‘소설’의 차이는 아주 중요한 배움이었다. 동화는 주인공이 세계와 부딪치면서 생기는 대립이나 갈등을 결국은 극복하고 화해를 지향한다. 현실이 어렵더라도 ‘있어야 할 것’ 즉 이상향을 독자에게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은 주인공과 세계의 대립과 갈등, 그 문제점을 제시할 뿐이지 결코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기질이나 쓰고 싶은 글은 동화였다.
또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도 확실하게 배웠다.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아이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세헤라자데의 살기 위해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드는 운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말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절박함에서 작가는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을 늘 인식하려고 한다.
<돌 맞은 하마궁뎅이>는 실제로 만났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쓴 작품인데, 공들여 여러 번 고쳐 쓴 이야기들이다.
<새라의 신비한 비밀 옷장>과 <우리 반 암행어사>는 저학년 장편동화인데, 그 작품을 읽어 본 제자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선생님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공통점이 있어요. 괴롭히는 나쁜 아이한테 복수를 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극복해 나가요!”
그러고 보니 내 주인공들은 문제를 피해가거나 도망치진 않았지만 적에게 이를 갈면서 해코지를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천적과 여행하기>나 <모래에 써서 괜찮아>도 그런 경향이 있다.
또 <내 이름은 김창>과 <황금갑옷>도 다 복수와는 거리가 멀다. 유일하게 복수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유쾌한 복수를 그린 <돌 맞은 하마궁뎅이>이고, 그 속에 나오는 악당 캐릭터인 ‘하정주’란 남자애를 독자들이 좋아해서 신기했었다.
‘작가와의 대화’로 강의하러 간 학교 두 군데에서 고학년 남자애들이 ‘하정주의 이야기를 긴 장편으로 읽고 싶다’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에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아마 내 천성은 복수를 해도 유쾌하게, 동화를 쓸 때만큼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향이 되는가 보다.
 
(10) 동화를 쓸 때마다 너무 고마워
동화를 쓸 때마다, 쓸 기회가 생길 때마다 속으로 늘 고맙고 감사하다.
지금도 작가로서 멀었지만, 지금보다 더 이름이 없고 기회가 없었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그래서 책이 더 나온다고, 기회가 더 생겼다고 들뜨거나 조급해지지 않는 듯하다. 그냥 숨을 쉬듯이, 밥을 먹듯이 꾸준히 글을 써나가려고 한다.
 
(11) 나의 좌우명
어느 작곡가가 말한 좌우명을 나도 빌려서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센스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힘이다.’
비록 난 재능이 부족하지만 ‘취재’를 기자처럼 열심히 해서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는 편이고, 소외된 진실과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독자들이 볼 수 있게 환한 곳으로 불러내는 작품을 쓰고 싶다.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대작을 쓰거나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할지라도 내게 글을 쓰는 일은 엄숙하고 고유한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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